1.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레 미제라블>의 'I dreamed a dream'을 부를 때, 뮤지컬 버전이라기보단 2012년판 영화 버전에 더 가깝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절대로 성공할 리가 없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버전의 'I dreamed a dream'은 뮤지컬보다 더 극적인 상황에서 부르는, 더 처절하게 절규하며 울부짖는 극한의 노래니까.


뮤지컬과 영화 모두를 본 이라면 알겠지만, 영화에서 이 곡이 등장하는 순간과 맥락은 뮤지컬과는 조금 다르다. 뮤지컬에서는 공장에서 쫓겨난 팡틴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 노래를 부르지만, 영화에서는 훨씬 상황이 안 좋다. 팡틴은 이미 공장에서 쫓겨나고 코제트의 약값을 대기 위해 어금니를 뽑아 팔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판 이후다. 더 이상 팔 게 없어진 팡틴은 원치 않는 성매매에 나서고, 처참한 심경으로 첫 손님을 받고 심신이 망가진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노래한다. 내게도 꿈이 있었노라고. 이렇게 배치하는 순서와 맥락을 바꾸자, 'I dreamed a dream'은 뮤지컬에서보다 더 처절하고 절망적인 곡이 되었다.




누군가 유투브에 뮤지컬 버전과 영화 버전을 비교해서 들어보라고 올려놓은 영상이다. 10주년 기념공연의 루시 헨셜, 25주년 기념공연의 레아 살롱가, 그리고 영화 버전의 앤 해서웨이 순서다.



한번 누군가 그렇게 혁명적인 해석을 해내고 나면, 그 뒤에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또한 그 자장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설득력이 넘치는 앤 해서웨이의 버전을 따라하고 싶은 욕망이야,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시도는 누가 하든 실패로 돌아갈 것이란 점이다. 뮤지컬 버전대로 부른다면 - 아무나 루시 헨셜이나 레아 살롱가처럼 잘 부를 수는 없겠지만 - 적어도 욕을 먹을 일은 없다. 정해진 노트를 착실하게 따라가 찍고 오는 것만 가능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앤 해서웨이의 버전을 흉내내는 순간 그건 확 가짜가 된다. 앤 해서웨이 본인도 똑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부를 수 없을 것이니까.


영화판 <레 미제라블>은 배우들이 소형 이어셋을 귓 속에 장착하고, 배우 본인의 페이스에 맞춰 즉석에서 피아노를 쳐주는 스태프의 연주를 들으며 라이브로 노래하는 방식으로 촬영됐다. 노래 중간중간 울부짖으며 숨을 몰아쉬거나, 어느 대목에서 넘쳐오르는 분노로 목소리가 뒤집히거나 하는 건 모두 그 순간의 감정을 담은, 그 테이크에서만 가능했던 연기의 일부다. (클로즈업과 롱테이크가 영화적으로 강렬한 효과를 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곡의 대부분이 편집 없는 원테이크로만 보여지는 건 그 테이크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그 장면에서의 앤 해서웨이의 연기는 실로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혼자 체념했다가 옛 추억에 부풀어 올라 웃다가 돌연 분노해서 절규하고 흐느끼다가 끝내 다시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오는 연기. 그동안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해 왔음에도 지속적으로 저평가 받아왔던 설움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자신한테 허락된 그 짧은 시간에 앤 해서웨이는 연기력을 한껏 과시한다. (나는 오로지 그 장면을 큰 스크린에서 다시 보기 위해 극장을 두 번 더 찾았다.) 나는 몇 차례인가 "그 장면에서의 앤 해서웨이는 마치 '오스카 내놔 이 XX것들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고 농담하기도 했었다.



오스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안고 자리로 돌아가는 앤 해서웨이. 그의 수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아이를 안듯 소중하게 트로피를 안고 오묘한 표정으로 걷는 앤 해서웨이의 사진을 보며 난 한 차례 더 울컥했다.오스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안고 자리로 돌아가는 앤 해서웨이. 그의 수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아이를 안듯 소중하게 트로피를 안고 오묘한 표정으로 걷는 앤 해서웨이의 사진을 보며 난 한 차례 더 울컥했다.


그러니 그걸 누가 따라해서 성공할 수 있단 말인가. 앤 해서웨이 본인도 똑같이는 반복하지 못할 연기인데. 배역을 위해 11kg을 감량하고, 머리를 밀고, 팡틴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성노동자들에 대해 다룬 논문들을 찾아 읽고, 자신 안에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을 요구해 얻어낸 장면인데 말이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제 듣는 사람이나 부르는 사람이나 이 정도로 처절하게 부르지 않으면 팡틴의 심경에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된 건지도 모른단 생각을 잠시 했다. 저 노래를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대체로 팡틴보다야 삶의 질이 훨씬 높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내적으로 피폐해진 이들 입장에선, 어지간히 슬프고 처절한 노래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이 가설에는 다른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원작 뮤지컬이 발표되었던 1980년대에서부터 지금까지 30여년, 대중문화는 점점 더 그 자극의 역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아침 소프 오페라만의 영역이었던 막장의 흐름은 각종 리얼리티 쇼,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에 이식되었고, 사람들은 더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느 날 앤 해서웨이와 톰 후퍼의 영화가 새로운 해석의 'I dreamed a dream'을 선보이자, 사람들은 더 이상 옛 버전이 주는 감흥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둘 중 어느 쪽 가설을 택하더라도, 쓸쓸하긴 마찬가지지만.









2. 최근 본 동영상 중 가장 묘했던 것은 일군의 시민들이 신촌 UPLEX 앞에서 벌인 플래시몹 영상이었다. 민주노총 강제침탈,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 강행 추진 등의 정부 독주에 대한 분노와 항의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은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수록곡 ‘민중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한국어 버전을 합창했다.





'오유'라는 준말로 더 많이 알려진 '오늘의 유머' 사이트 회원분들이 한 거라는데, 유투브 페이지 댓글들은 안 보길 권한다. 이 플래시몹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이들이 리플란을 악플로 가득 채우고 있다. 비단 이번 플래시몹뿐 아니라, 이 노래는 전 세계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애창되는 곡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2013년 터키 시위에서도 불렸고





대만의 반정부 시위대 또한 이 노래를 불렀다. 중화권 반정부 시위대들이 이 노래를 돌림노래처럼 부르기를 좋아해서, 중국에서 이 노래를 합창하면 공안들이 달려온다고 하던가.





제일 최근에는 1월 1일, SBS CNBC의 김형민 PD님 - 아마 '산하'라는 필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겠지만 - 이 몇몇 분들과 함께 경찰에 의해 강제침탈당한 민주노총 본부 건물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새해를 열었다고 한다.


내가 저 플래시몹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아직도 정확하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난 이 노래가 조금은 더 신중하게 불려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노래는 투쟁 끝에 죽을 수도 있음을 상정한 노래 아닌가. 


이 노래의 가사를 유심히 뜯어보면 '순교자들의 피가 조국의 땅을 적신다.'라거나,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칠텐가. 내 옆에 굳건하게 서서 함께 싸우겠는가.' 등, 죽음을 각오한 이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마리우스와 ABC의 친구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고립된 채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고 이 노래를 부른 건 아닐테지만, 여전히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부르는 노래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요즘도 종종 마음이 당기는 이슈가 생기면 시간을 쪼개어 시위에 나가지만, 그러면서도 난 여전히 많은 것들이 두렵다. 난 정말 내 안온한 삶을 다 포기하고 죽어도 좋은가? 지금 나를 길 위로 불러낸 이 의제 때문에 정말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는가? 글쎄, 잘 모르겠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나아가자는,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난 여전히 마음 한 켠이 무거운데. 죽음을 상정한 노래를 부르면서도 씩씩하게 웃어 보이는 이들을 보면서 난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다. 저들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동시에 이 노래는 승리를 가정하고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민중들이 자신들의 싸움에 동참해 줄 것이라는 아주 나이브한 비전을 가지고 고작 술집 하나를 점거한 채 시작한 이 싸움은,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형편없기 짝이 없다. 자유주의자 라마르크 장군의 죽음에 슬퍼하는 인민들이 많은 장례식날이 봉기하기 좋은 날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국 아무도 그들의 싸움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들은 눈 앞의 호기는 봤으나 시대의 큰 흐름은 보지 못했다. 봉기는 실패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한참을 싸우다가 죽어버렸다.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선 그런 움직임이 봉화가 되어 더 많은 참여를 이끌어냈고 결국엔 민주정을 쟁취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패배한 전투이나 승리한 전쟁의 일부라고도 말할 수 있을테고. 하지만 역시나 죽음은 죽음이다. 자신을 개인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라고 자기최면을 걸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승리를 위해 죽은 거니까. '내일이 오면 신이 뜻한 바를 알게 되리라'며 호기롭게 일어난 청년들은 결국 모두 죽었고, 평생을 은둔자이자 도망자로 살아온 '선량한 자본가' 출신의 장발장이 살려낸 마리우스만이 살아남는다. 그게 정말 신의 뜻이었을까. 청년들의 개죽음이?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패배의 노래인 것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야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혀 쓰러진 후 남은 이들이 그 유지를 이어받아 다시 일어서기 위해 부르는 노래라고는 하지만, '민중의 노래'는 더 많은 민중들이 나올 것이라는 긍정적인 비전을 가지고 큰 전략도 없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이들의 노래인 셈이다. 그래서 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아, 저 이들은 자신들은 죽을지라도 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싸움에 동참해 끝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겠지. 자신들이 철저히 고립된 채 죽어갈 것이고 봉기는 자신들이 진압됨과 동시에 끝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 저 노래를 부르는 플래시몹의 군중들을 보면서 여러가지로 기분이 미묘했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민중의 노래'는 죽음을 상정한 채 패배를 앞두고 부르는 노래니까.


뭐, 물론 노래는 노래일 뿐이라고 하면 별로 할 말은 없다. 다만 난 1막에서 불리우는 '민중의 노래'보다, 2막 피날레에서 불리우는 '민중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 그렇게 죽어간 이들은 2막의 마지막에서 다 같이 입을 모아 노래한다. 모든 것이 정의로운 신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그리고 그 비전 속에는 그들이 살아서 이루고 싶었던 세상에 대한 비전이 담겨져 있다.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삶 속에서 모두 총칼을 버리고 쟁기질을 하며 살며, 족쇄는 깨지고 모두가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세상. 우리가 그토록 이 땅 위에서 이루고 싶었던 세상의 모습이 신의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은, 우리가 결국은 정의의 편에 서 있었으며 지금은 이르지 못했더라도 끝내 그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를 노래한다.




1분 32초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 장발장은 그 동안 죽어갔던 이들이 모두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노래하는 환상을 보며 세상을 떠난다.



물론,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이미 죽은 이들이다.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들. 나처럼 태생이 비겁한 이들은 그저 그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바라보며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혹은 부끄러워 할 따름이다. 어쩌면 그렇게 시대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것이 비겁자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사명인지도.








3. 내가 페이스북에 윤상이 작곡하고 정재일이 편곡한 버전의 'El Camino'를 좋아한다고 글을 올리자, 20대 언론을 표방한 < 고함20 >의 박정훈씨가 리플을 달았다. 자신은 윤상의 노래 중 'Ni Volas Interparoli' 를 더 좋아한다고. 두 곡 모두 아름다운 곡이고, 둘 중 어느 쪽을 좋아하든 그건 취향의 문제겠지만, 문득 이게 흥미로운 지점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Ni Volas Interparoli'는 에스페란토어로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라는 뜻이다. 이 노래는 연주곡 위에 에스페란토어 내레이션을 입힌 곡인데, 만국의 인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표방하고 탄생한 언어 에스페란토어의 간략한 역사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언어로 그대들과 대화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장벽이 없는 소통, 모두가 똑같이 대화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그린 노래다.





'El Camino'는 스페인어로 '길'이란 뜻이다. 윤상이 노영심에게 선물하고, 다시 다듬어 자신의 4집에 수록한 오리지널은 단출한 피아노와 신스 반주 위에 풍물패의 연주가 깔린 단아한 곡이지만, 정재일의 손을 거치면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풍물패가 모두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곡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전에 내가 처음 홈페이지를 열면서 적었던 설명을 다시 옮겨보자.


"윤상이 작곡한 'El Camino'가 처음 수록된 앨범은 노영심의 피아노 앨범 <무언가(無言歌)>(1997년)였다. 노영심의 단정하고 애잔한 피아노 연주 뒤로 윤상이 샘플링을 따서 미디로 프로그래밍한 풍물패의 장단이 흐르는 'El Camino'는 곡에 들인 공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는 못 했다. 윤상은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던지 자신의 앨범 <이사(移徙)>(2002년)에 다시 한번 이 곡을 실었다. 노영심의 피아노 뒤를 받쳐주는 신시사이저의 볼륨이 조금 더 향상되며 공간감이 향상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곡의 구성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곡의 운명도 그리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같은 앨범의 동명의 타이틀 '이사'나 '소월에게 묻기를'이 주목을 받는 동안 'El Camino'는 그렇게 주목받지도, 회자되지도 않았다.


윤상을 사랑하는 후배들과 친구들이 참여해 그가 걸어온 궤적을 되짚어보는 앨범이었던 < Play with Him! - Yoonsang Songbook >(2008년)에 들어 이 곡의 운명은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목소리 빼면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음악천재 정재일은 '푸리' 출신의 김웅식을 모셔와 장고와 꽹과리를 라이브로 녹음했고, 신시사이저의 자리에는 실제 스트링을 넣으면서 곡의 스케일을 대폭 확장시켰다. 동시에 애잔하게 흐르기만 했던 원곡의 흐름에 기승전결을 짜넣고 속도감을 부여했다. 단정하고 애잔하며 아련했던 윤상의 'El Camino'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길 위에서 찾아오는 쓸쓸함과 벅참이 모두 어우러진 정재일의 'El Camino'로 다시 태어났고, < Play with Him! - Yoonsang Songbook > 2번째 CD를 여는 첫 트랙으로 당당히 실리게 된다. 윤상 스스로도 Mnet < A-Live >에 출연해 "곡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여러 말 할 것 있으랴.


처음 노영심의 피아노 앨범 <무언가(無言歌)>에 실렸던 'El Camino'는 가사가 없었다. 그러나 정재일이 편곡한 'El Camino'에는 윤상의 오랜 동료 박창학이 직접 쓰고 읽은 텍스트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길을 잃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다.

셀 수 없이 펼쳐진 수 많은 길 앞에서

길을 잃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에 빠져

길을 잃다.


길은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 길은 있다.

끝내 내가 그 길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어딘가에

길은 있다.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 라이브 버전. 이 버전에선 그 내레이션이 생략되었다. 피아노를 치는 이가 이 곡의 편곡자 정재일.



"우리는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노래와, 길을 찾지 못해 절망했지만 끝내 어딘가에 길은 있을 거라 믿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한 개인의 노래. 꼭 가사 때문에만 그런 건 아니지만, 평생 제 잘난 맛에 살며, 회식이니 모임이니 다 거추장스럽고 혼자 집에 있는 게 제일 편한 개인주의자인 내가 두 곡 중 'El Camino'에 더 마음을 준 건 제법 그럴싸한 결론 아닌가.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노래한 'Ni Volas Interparoli'를 좋아하는 박정훈씨의 주된 지난 행보가 20대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 < 고함20 >이었다는 것만큼이나.


아이러니한 건 이런 내가 지난 2013년 한 해 가장 열심히 한 활동이 '가감 없는 진실을 보도해 학교 내에 건강한 소통의 창구를 열고, 그를 통해 공동체로서의 국민대학교 학생사회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매체 <국민저널> 편집국장직이었다는 점이다. 굳이 이 아이러니를 정당화 해보자면, 한 개인이 쓸데없는 참견이나 오지랖, 권력으로부터의 억압을 피해 온전히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감시하고 그에 맞서 싸우며, '개인으로서의 내 권리가 보장되려면 다른 이들의 권리 또한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함을 알고 있는 개인들의 연대'로서의 건강한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곳에서만, 개인주의자 또한 자유롭게 숨쉴 수 있을테니까.



신고

트랙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URL을 배껴둬서 트랙백을 보낼 수 있습니다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word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