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 20180210

2018.02.10 03:13

아주 오래 블로그에 새 글을 쓸 엄두를 못 냈다.


다른 핑계 댈 것도 없다. 우울해서 그랬던 거지.


하여 페이스북에 적었던 오늘의 생각을 여기에 옮겨 적어둔다. 이 기록이 훗날 다시 우울이 몰려올 때 내게 동앗줄이 되어주길 바라며.




프리랜서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언제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프리랜서라는 말이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게 자신이 자유롭게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멋진 노동형태라고 생각했지만, 본질은 발주처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내 모든 일정을 상시 비워둬야 하는 24시간 대기상태의 노동 아닌가. 그러니 프리랜서가 확실하게 약속시간을 확정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아예 그 시간대에 들어올 지 모르는 잠재적인 노동기회를 포기하며 2-3주 전쯤 미리 약속을 잡아놓거나, 아니면 오늘은 더 이상 대기할 필요가 없다는 게 확실해져서 1시간 안으로 약속을 급하게 잡거나.


얼마 전 저녁 시간 잡혀있던 일정이 갑작스레 취소되었을 때 나는 패닉했다. 갑자기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일과 무관하게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한참 혼자 글을 쓸 때는 외롭다는 생각을 안 하는데, 갑자기 공백이 생기면 그 순간 그간 잊고 지내던 외로움들이 한꺼번에 달려오며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통에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갑자기 연락한다고 연락을 받고 흔쾌히 달려 나와 줄 사람이 그리 흔한가. 다들 자기 직장이 있고, 자기 가정이 있고, 자기 일정이 있고, 아니면 달려 나오기엔 너무 먼 곳에 살고 있고... 애초에 안 될 것 같은 이들을 그렇게 머릿 속으로 다 제하고 나니 남은 연락처가 정말 한 손 안에 들어왔는데, 안타깝게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 그 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그냥 "아, 다들 바쁜가 보군."이라 생각하며 집에 가면 되는데, 사람이 우울함이 극에 달하면 사고회로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어떻게든 상황을 안 좋게 바라보려는 비관의 관성이 작동하며, 사람을 익숙한 절망과 체념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 내가 편하게 연락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내가 얼마나 주변을 안 챙기고 가까이 하기 까탈스러운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철저하게 혼자가 됐을까." 이렇게 정확한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상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이대로 혼자 울적한 생각을 하며 자책을 하다가는 더 우울한 상태로 빠질 것 같아 팔짱을 끼고 밤길을 걸으며 소리 내어 혼잣말로 나를 달랬다. 맛있고 따뜻한 걸 사먹자. 그러면 조금 기분이 좋아질 거야. 기분이 좋아지고 나서 지금의 이 상황을 다시 생각하면, 아마 모든 정황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보일 거야.


결국 내 혼잣말이 맞았다. 따뜻한 저녁을 사먹고 물을 마시며 조용히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니, 그냥 운이 없었던 어느 평일 오후였을 뿐이었다.


무기력과 우울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장기적인 계획과 별개로, 갑자기 우울과 자기혐오가 몰려오는 그 찰나의 순간을 이겨낼 무언가가 필요하다. 가장 치명적인 건 결국 순간이다. 우울함이 피크를 찍는 그 찰나의 순간을 이겨낼 만한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운동이든, 음식이든, 독서든, 프라모델 조립이든, 영화관람이든.



사진은 불광천에서 종종 마주치는 왜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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